플래쉬가 상당히 약하다. 그런데 오늘 빛의 그림과 관련된 플래쉬 작업을 하니 왠지 기분이 업된다.
1. 빛의 궤적을 찍으려면 장노출과 함께 F8, F11 정도의 조리개가 적당하다.
2. 불을 모두 끈 상태에서 후래쉬로 그림을 그리면 빛의 그림이 사진에 그려진다.
일단 조리개를 최대한 풀고 촛점을 미리 잡아놓는다 그 후에 셔터는 벌브로 맞춘다.
후래쉬를 비추고 있는 동안 셔터를 누르고 있으면 된다.
후래쉬 빛도 빛이라 상당히 배경도 선명하다. 참 재미있는 작업이다.
다음은 내가 찍은 빛의 그림이다.


과거에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사진이 유행이지만 현대에는 데만드 토마스(1964년생)처럼 사진을 만드는 작업 과정을 중요시 한다.
그는 회화와 조각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겠다.
매체에서 발췌한 이미지를 종이 모형의 실물크기로 재창조하여 사진으로 촬영한 후 해체를 한다. 이 때 이미지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나 이슈화된 사건을 이미지로 본 후에 종이로 재구성하면서 구체적인 단서나 사실 여부를 전 부 없애버리고 실재를 조작하고 허구로 만들어 권력이나 사건 사실을 은폐한다.
보는 사람은 재창조된 이미지를 보면서 추상적이다. 뭔가 잘못 되었다를 처음에 인식한다. 다음으로 사진에 명확한 지시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의미를 파악한다. 이를 거리두고 보기라 한다.
좀 난해하지만 조각이라는 예술과 사진과의 만남으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던 강의였다.
다른 사람 블러그 내용을 옮겨온 것입니다.

아라리오 겔러리에서 그의 작업을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실재 장면인지 디지털 페인팅인지 분간 할 수 없는 묘한 기분만을 줄 뿐.(단지, 그것은 촬영의 기술적인 측면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저 사실주의적 사진일 뿐이겠거니 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웹서핑을 하다 우연찮게 그의 작품에 관해 알게 된 후 예술 작품은 항상 열려있다 라는 그말을 다시 한번 몸소 느끼게 되었다.
Thomas Demand는 1964년 독일 뮌헨 출신의 사진 작가로, 현대 독일 사진계 뿐만 아니라 예술계에 주요 인물이 되어버린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의 이미지자체 만을 보면 아무런 의미나 어떤 담론을 추출할 수 있는 장치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은 미술관벽면에 걸린 거대하게 출력된 그 이미지가 아니다. 바로 그곳에 걸리기 이전의 과정과 우리눈에 보이는 그의 사진의 허구성이 중요한 포인트 이다.
이 사진은 실재로 존재하는 공간을 종이와 마분지등을 이용하여 작가가 재구성한 공간이다. 신문이나 광고, 영화에서 보이는 실재 공간, 자신의 과거의 기억속에 끄집어낸 가상의 공간, 그리고 어떤 역사적 공간들을 인공적으로 재구축 하여, 그것을 사진으로 다시 찍고, 그 만들어진 공간은 다시 부셔버린다. 이러한 작업과정을 거쳐 미술관 벽면에 커다랗게 걸린 사진은 실재 존재하는 공간이기도 하며, 지금은 없는 공간이 되기도, 있었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의 사진은 사진의 실재성을 이용하여 완전한 허구를 보여주는 이율배반적인 작업이다.
사진이 발명을 통해 인류는 실재의 기록을 이미지로 가능케 했다. 오늘날까지 메체를 통해 접하는 수많은 사진들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고 향유시켜 준다. 사실 지금 이시대에 그러한 매체의 속성은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는 도구로 쓰이는 네러티브한 현실을 보이는데 얼마나 많이 이용이 되는가. 작가는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사진을 통해 공유하고 그것이 언제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러한 방식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의 작품을 대면하는 사람은 거대한 사진속에 보이는 공간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의 여지 없이 지나 칠 것이다. 그렇게 지나치는 순간 우리는 조작된 실재를 믿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조작되고 은폐된 지식과 정보들을 무심코 사실이라 인식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은 아닐지 생각이 든다.

